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밀리안 콜베 (문단 편집) == 순교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rl_Fritzsch_at_Auschwitz.jpg|width=100%]] || || [[카를 프리치]] ||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나오자 수용소 지휘관이자 [[SS]] 최고돌격지도자[* Hauptsturmführer. 국방군 [[대위]]에 해당하는 계급이다.]인 [[카를 프리치]](Karl Fritzsch, 1903 ~ 1945)[* 프리치의 최후가 어떤지는 불분명하다. 공식적으로는 1945년 5월 2일 이후로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 상태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사망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나, [[소련]] 측에서는 [[영국]] 정보부 [[영국 비밀정보부|MI6]]이 그를 [[노르웨이]]로 끌고 갔다고 주장하였다.]는 14A동 블럭 사람들 중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냈다.[* 당시 프리치의 처벌 방식이었다. 탈주자가 생긴 동의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세우고 10명을 내키는대로 골라 처형장에 보냈다.] 그리고 그들을 지하감옥에 가두어 아사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이 10명 가운데 [[폴란드군]]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Franciszek Gajowniczek, 1901.11.15.~1995.3.13.)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요브니체크는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 [[신부(성직자)|신부]]이며,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 라고 자청하여 나섰다. 프리치는 이를 승락했고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일반적으로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방이니 그야말로 상상초월인 상황. 그러나 콜베 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때때로 감옥의 모습을 보러 온 통역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성가가 들려, 마치 감옥이 [[성당]]처럼 느껴졌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음식도 물도 주어지지 않은 채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독약인 [[페놀]]을 주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팔을 뻗었습니다. 나는 보다 못해,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감시병과 보프가 나간 뒤 다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벽에 기대앉아 눈을 뜨고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의 증언 콜베 신부의 시신은 그가 목숨을 잃은 다음날이자 [[성모승천대축일]] 날짜인 [[8월 15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다. 생전에 "성모승천대축일에 죽고 싶다."고 말했던 그의 소원은 순교자로서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